리베르스쿨
Ⅲ. 일제 식민지 지배와 민족운동의 전개
1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
3) 일제의 경제적 수탈
산미 증식계획으로 미곡을 수탈하다
제1차 세계대전 특수로 일본에서는 산업이 발전하였찌만, 많은 농민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면서 쌀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해졌다. 일제는 자국의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쌀을 증산하여 수탈하는 산미증식계획을 시행하였다. 이 계획은 1920년부터 1934년까지 15년 동안이나 시행되었는데, 이 기간에 많은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일제는 한반도의 쌀 생산량을 늘리고자 저수지, 제방 등 수리 시설 확충에 힘쓰고, 화학비료 사용 등을 권장하였다. 수리 시설의 신설과 관리를 위해 전국 각지에 수리조합을 조직하였는데, 지주들이 조합비용을 소작농에게 떠넘기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에 농민은 수리조합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가 증산된 쌀보다 더 많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서 한반도의 식량**은 악화되었다. 이에 만주에서 조, 수수, 콩 등 값싼 잡곡을 들여왔다. 쌀 반출로 쌀이 상품화되면서 토지회사와 대지주는 큰 이익을 보았다. 반면에 농민은 수리조합비뿐 아니라 고율의 소작료, 비료 대금 등 쌀 증산 비용까지 부담하여 생활고를 겪게 되었다. 몰락한 농민들은 화전민이 되거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였고, 만주나 연해주 등지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산미증식계획은 1930년대 들어 일본의 쌀값이 하락하자 일본 지주들이 조선 쌀의 수입을 반대하여 1934년에 중단되었다. 하지만 중일전쟁으로 군량미 확보가 시급하자 일제는 중단하였던 산미증식계획을 재개하였다.
사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군산항에 쌓아 놓은 쌀가마니들
역사현장 속으로 – 군산의 쌀 수탈 현장, 뜬다리와 미곡 창고
군산 내항 뜬다리부두: 간조와 만조의 수위 변화와 무관하게 대형선박을 접안시키기 위해 뜬다리와 부유 구조물을 조성하였다. 군산은 1899년 개항 이후 호남지역 쌀 수탈의 거점 항구가 되었다.
군산의 미곡창고: 1930년대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에서 쌀을 보관한 미곡창고이다. 2012년에 다목적 공연장으로 재탄생하였다.
씨마스
Ⅲ. 일제 식민지 지배와 민족운동의 전개
3. 식민 통치의 변화와 민족운동의 성장
3-1 ‘문화 통치’와 산미증식계획
산미증식계획, 쌀 생산이 늘었으나 농민은 몰락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일본은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공업화가 더욱 진전되었다. 이에 도시 노동자가 증가하고 쌀 수요가 늘면서 쌀값이 폭등하였다.
일제는 본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한국에서 쌀 생산을 늘려, 더 많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산미증식계획을 시작하였다. (1920) 이후 수리시설 확충, 토지 개량, 개간과 간척, 품종 개량 등으로 쌀 생산이 늘었으나 계획만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계획대로 일본에 쌀을 가져가 한국인의 1인당 쌀 소비량은 갈수록 감소하였다. 이에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하여 조, 수수, 콩 등을 만주에서 수입하였다.
소작료 인상, 수리 조합비와 종자 개량 비용 등을 떠맡게 된 농민은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반면, 토지 회사나 일부 지주는 일본으로 쌀을 수출하여 더 많은 이익을 챙겼다.
사료 읽기 – 산미 증식계획을 수립한 까닭
일본의 인구는 해마다 약 70만 명씩 증가하고 있으며, 국민 생활 향상으로 1인당 소비량도 역시 점차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 지금 쌀 생산을 늘릴 계획을 수립하여 일본 제국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국가 정책상 매우 시급한 일이라 믿는다. (조선총독부 농림국, 1926)
도표: 쌀 생산량과 일본으로의 유출량 (조선미곡요람, 1937). 산미증식계획으로 쌀 생산이 증가하였음에도 한국인의 1인당 쌀 소비량이 감소한 까닭은 무엇일까?
사진: 김제 동진 수리조합(1925) 김제평야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지주들에게 수리조합을 설립하여 수리 시설을 만들게 하고 그 비용을 부담하도록 하였는데, 지주는 이를 다시 소작인에게 떠넘겼다.
금성
Ⅲ. 일제 식민지 지배와 민족운동의 전개
1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
주제 40 일제의 민족 분열통치
산미 증식 계획의 시행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서 쌀값이 폭등하여 전국적으로 쌀 소동(1918)이 일어났다. 이에 일제는 자국의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을 식량 공급지로 만드는 산미 증식 계획을 시행하였다(1920).
일제는 한국의 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저수지나 수로 등 관개 시설을 늘렸고, 이를 축조·관리하는 수리 조합을 전국에 조직하였다. 또한 많은 밭을 논으로 만들었으며, 종자와 농기구를 개량하고 개간과 간척 사업을 시행하였다.
산미 증식 계획은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산미 증식 계획이 시행되면서 쌀 생산량은 다소 증가하였지만, 증산량 이상의 쌀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지주들은 쌀을 수출하여 부를 축적하였지만, 농민들은 지주들이 떠넘긴 수리 조합비와 각종 세금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은 수입된 값싼 만주산 잡곡을 먹기도 하였다.
또한 산미 증식 계획으로 인해 쌀 가격 변동에 취약한 쌀농사 위주의 단작 농업이 정착되었다. 실제로 대공황(1929)으로 쌀 가격이 폭락하자 많은 농민이 소작농으로 몰락하였고, 대지주의 토지 겸병은 더욱 심해졌다.
궁금해요: 일본에서 쌀 소동이 일어난 까닭
일본에서 산업화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자, 많은 농민이 도시로 유입되었다. 이에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고,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쌀 수입마저 감소하면서 일본의 쌀값이 급등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군량미에 대한 수요가 늘자, 상인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쌀을 사재기하였다. 이후 쌀값은 일반 민중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폭등하였고, 결국 일본 전역에서 쌀값 인하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자료 – 식량 수출입과 농민의 어려움
대개 조선인들이 생산한 쌀을 수이출(輸移出) 할 때, 결코 자신들이 충분히 소비하고 남은 것을 수출하는 것이 아니다. 생계가 곤란하여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파는 것이다. …… 그러므로 조선 쌀의 수이출이 증가하고 외국 쌀의 수입은 감소하는 반면, 속(만주산 잡곡)의 수입만이 증가하는 사실은 조선인의 생활난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 『동아일보』, 1927. 4. 8.)
동아
Ⅲ. 일제 식민지 지배와 민족운동의 전개
1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
02 1920년대 일제의 식민 통치와 경제 수탈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다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농촌 노동력 부족으로 쌀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게 되면서 식량이 부족해지고 쌀값이 폭등하여 사회가 불안해졌다.
일제는 본국의 부족한 식량을 한국에서 확보할 목적으로 1920년부터 15년 계획으로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농지 확장, 수리 시설 개선, 종자 개량 등을 통해 식량 생산을 늘려 일본으로 많은 쌀을 가져가고, 한국 농민의 생활도 안정시킨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산미 증식 계획으로 쌀 생산량은 어느 정도 늘어났으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가 증산된 양보다 더 많은 양을 일본으로 반출하여 한국인의 식량 **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한국인은 만주에서 수입한 조 · 수수 등 잡곡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농민들은 산미 증식 계획 과정에서 수리 시설 개선비와 종자 개량 비용 등을 떠맡게 되어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일부 자 · 소작농은 소작농으로 전락하였으며 경작할 땅을 잃은 농민은 화전민이 되거나 도시나 국외로 떠나야 했다. 반면 지주 중에는 쌀을 판매하여 큰 이득을 보는 사람도 있었다.
사진: 산미증식계획 풍자화. 산미증식계획으로 토지개량회사와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이익을 보는 것을 풍자하고 있다.
역사 깊이 보기 – 산미증식계획의 영향
도표: 농가호수 구성비(국사편찬위원회, 2001)
도표: 산미증식계획 기간 중 쌀 생산량과 1인당 쌀 소비량(국가통계포털, 2008)
생각키우기
01 1920년대 소작농이 증가한 까닭은 무엇인지 말해보자.
02 1920년대 한국인은 부족한 식량을 어떻게 해결했을지 이야기해보자.
미래엔
Ⅲ. 일제 식민지 지배와 민족운동의 전개
01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
3) 민족분열통치와 경제 수탈의 확대
산미 증식 계획(1920 ~ 1934), 쌀 생산은 늘었지만 농민은 굶주리다
일본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공업화가 진전되고 도시 인구도 크게 늘었지만, 농업 생산력은 이에 **지 못하여 쌀 부족 현상이 심각해졌다. 이에 일제는 한국에서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여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품종 개량, 수리 시설 구축, 경지 정리와 개간 사업 등을 통해 쌀 생산을 늘려갔지만, 증산량은 계획한 목표에 **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일제가 예정대로 쌀을 가져갔기 때문에 일본의 식량 **은 개선되었지만, 한국의 식량 **은 나빠졌다. 일제는 만주에서 조·수수·콩 등을 들여와 이를 보충하였다.
한국 농민은 높은 소작료와 지세, 공과금뿐만 아니라 비료 대금, 수리조합비, 토지 개량비 등 쌀 증산 비용마저 부담하는 이중적 수탈구조 속에 놓였다. 반면 토지 회사나 대지주는 농민의 곤궁한 처지를 이용하여 대농장을 더욱 넓혀갔다. 그 결과 자작농 중 많은 수가 소작농이 되거나 화전민,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였고, 만주나 연해주, 일본 등지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도표: 한국인과 일본인 쌀 소비량(조선총독부 농림국, 조선미곡요람, 1936)
그림: 수리 조합비 납부에 허덕이는 농민의 모습을 풍자한 만평(동아일보, 1926. 12. 7.)
비상
Ⅲ. 일제 식민지 지배와 민족운동의 전개
1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
3) 민족 분열 통치가 실시되고 경제 수탈이 확대되다
산미 증식계획 실시(1920 ~ 1934)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일본은 공업화를 이루었다. 공업화로 도시 인구가 증가하여 쌀의 수요가 급증하였으나, 농업 생산력은 이에 **지 못하여 식량이 부족해졌다. 그러자 일제는 한국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여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일제는 다수확 품종으로 벼 종자를 개량하고 비료 사용을 확대하였으며, 농토를 개간하고 밭을 논으로 바꾸었다. 또한 저수지나 제방을 만들기 위해 전국 각지에 수리조합을 조직하였다.
산미 증식계획으로 쌀 생산량은 그다지 늘지 않았으나, 일본으로 이출되는 쌀의 양은 해마다 증가하였다. 토지 회사나 지주들은 일본으로 쌀을 팔아 더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높은 소작료뿐만 아니라 종자 개량비, 비료 대금, 수리 조합비 등까지 떠맡게 되어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몰락한 농민들은 화전민, 도시 빈민이 되거나 만주와 연해주, 일본 등지로 이주하였다.
수리조합: 수리 시설의 신설, 보수, 관리 등을 위해 만든 조직이다. 지주가 부담하던 건설비와 조합비를 소작농에게 전가하는 일이 많았다. 이에 농민들은 전국적인 수리조합 반대운동을 벌였다.
도표: 쌀 생산량과 쌀의 일본 이출량 (조선총독부, 농업 통계표, 1930 / 조선 총독부 통계연보 1920 ~ 1930)
지학
Ⅲ. 일제 식민지 지배와 민족운동의 전개
1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
03 문화 통치와 경제 수탈의 확대
산미증식계획으로 농촌의 경제 문제가 악화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공업화와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도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경제 호황으로 물가가 상승한 가운데 쌀 생산량이 감소하자 일본의 식량 **이 악화하였다. 쌀값이 폭등하면서 일본 각지에서 쌀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쌀을 증산하여 일본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고자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밭을 논으로 바꾸고 품종 개량 시도하였으며, 수리 시설을 확충하고자 각 지역에 수리 조합을 설립하였다. 대규모 개간과 간척사업도 실시하여 토지를 확보하는 등 쌀 증산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증산량보다 더 많은 양의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면서 한국인의 1인당 쌀 소비량이 줄어들었고, 일제는 한국의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만주에서 잡곡을 대량으로 수입하였다. 지주는 소작료로 거두어들인 쌀을 되팔아 부를 축적하였지만, 소작농은 고율의 소작료에 비료 대금, 토지 개량비, 수리 조합비 등 증산 비용까지 떠안으면서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이에 몰락한 농민들은 화전민이 되거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였고, 만주나 연해주 등 해외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사료 읽기 – 일본의 쌀 부족 문제
일본 내 쌀 소비는 연간 6,500만 석인데, 생산량은 약 5,800만 석을 넘지 못해 그 부족분을 제국 반도 및 외국의 공급에 의지하는 형편이다. … 따라서 지금 미곡 증식 계획을 수립하여 일본 제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진실로 국책상 시급한 일이라고 믿는다. (조선산미증식계획 요강, 1926)
일본에서 쌀 생산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쌀 부족 문제가 발생하자, 일제는 한국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여 이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도표: 1920년대 한국의 쌀 생산량과 반출량(조선총독부, 농업 통계표, 1930 / 조선 총독부 통계연보 1920 ~ 1930)
사진: 일본으로 반출하고자 군산항에 쌓아 놓은 쌀 가마니. 군산항은 전라도 곡창 지대의 쌀을 일본으로 보내는 주요 항구로, 일제는 더 많은 쌀을 반출하고자 철도를 증설하고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 뜬다리 부두까지 만들었다.
사진: 군산한 축항 기공식 축하 탑(1926) 일제는 쌀 반출을 위해 대대적으로 군산항 확장 공사를 진행하였고, 쌀로 탑을 쌓아 이를 기념하였다.
해냄
대주제 3 일제 식민지 지배와 민족운동의 전개
주제 07 허울뿐인 문화통치에 고통받다.
누구를 위한 산미증식계획이었을까?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하였다.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많은 농민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에서 쌀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쌀값이 폭등하자, 쌀가게를 습격하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일제는 자국의 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식민지 조선을 일본의 쌀 공급 기지로 만들려는 산미 증식 계획을 시행하였다. 산미 증식 계획의 내용은 크게 토지 개량과 농사 개량으로 나뉘었다. 전자에는 수리 시설의 확충·개간 과 함께 밭을 논으로 바꾸는 사업이, 후자에는 품종 개량과 비료 사용 확대 등이 포함되었다. 이를 통해 쌀 생산량은 다소 증가하였다.
그러나 늘어난 쌀의 양보다 훨씬 많은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이 시기 조선인의 쌀 소비량은 크게 줄어 같은 시기 일본인 쌀 소비량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되었다. 수리 조합 구역에 있던 마을의 경우 소작농은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물 사용료 명목으로 수리 조합비를 따로 내는 경우가 많았다. 소작료는 60% 정도였는데 여기에 봄에 빌린 비룟값, 농자금에다가 수리 조합비까지 붙어 고통을 받았다.
반면 지주들은 농지 개량을 비롯한 각종 명목으로 조선 총독부로 부터 많은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에 힘입어 지주들은 토지를 확대하고 소작료로 걷은 쌀을 일본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일제는 지주에게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 주어 일제의 협력자로 만들고자 하였다.
사진: 군산항에 쌓아 놓은 쌀 가마들. 이 많은 쌀가마들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갔을까?
도표: 쌀 생산량과 일본으로의 이출량 (국가 통계포털, 2019 / 동아일보, 1932. 1. 24.)
생각톡톡 – 수리조합사업, 중소지주까지 몰락하다.
도표: 박수현, 일제하 수리조합 사업과 농촌사회의 변동, 2001)
왼쪽의 자료는 수리 조합 지역의 중등 논 1단보(991제곱미터, 300평)당 토지 가격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모두 수리 조합이 설치된 이후 논의 가격이 크게 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수리 조합은 토지 소유자들이 자신의 농지에 관개용 저수지나 제방을 설립하기 위해 만든 단체였다. 그러나 과도한 수리 사업 비용이 문제였다. 일본의 경우 공공사업의 성격이 강한 수리 조합 공사비에 대한 정부 보조가 70~80%나 되었지만, 조선에서는 20~30%에 불과해 이자 부담이 아주 무거웠다.
따라서 이를 견디지 못한 자작농이 토지를 팔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을뿐 아니라 중소 지주조차 몰락하게 되었다. 오직 일본인 지주 등 상당한 재산을 갖춘 일부 대지주만이 이 사업을 이용하여 토지 소유를 확대할 수 있었다.
천재
Ⅲ. 일제 식민지 지배와 민족운동의 전개
Ⅲ-1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
03 민족 분열통치와 경제 수탈의 확대
산미 증식 계획으로 농민 생활이 악화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 되고 도시 인구가 늘어나면서 쌀 생산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때문에 쌀 소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일본 내의 식량 확보를 위해 1920년부터 한국에서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는 일본 벼 품종 보급, 수리 시설 확충, 화학 비료 사용, 밭을 논으로 만드는 방법 등을 동원하여 한국에서의 쌀 생산을 늘려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정책이었다.
산미 증식 계획이 실시되었으나 일제가 계획한 대로 쌀 생산이 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으로의 쌀 반출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또한 산미 증식 계획으로 농민들은 수리 조합비와 비료 대금을 떠맡게 되었다. 게다가 지주들이 일본에 더 많은 쌀을 팔기 위해 소작료를 올리는 바람에 농민들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다.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에서 식량 생산이 늘어나 쌀값이 하락하자, 한국의 쌀을 들여오는 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일제는 이를 감안하여 산미 증식 계획을 중단하였다(1934)
사료 - 수확량보다 열 배나 많은 수리 조합비
소위 산미 증식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수리 조합이 만들어지고 있으나, 사실은 조합원들의 의사를 물어 보지 않고 당국이 마음대로 만든 것이다. 조합원들은 수리 조합 때문에 크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경기도의 부평 수리 조합의 경우에는 조합원들이 수리 시설로 얻는 이익보다 조합비 부담액이 크다고 한다. 어떤 조합원들은 수리 조합이 만들어지기 전에 거두던 수확보다 열 배나 많은 조합비를 내고 있다고 한다.
- 『동아일보』, 1926. 12. 6. -
도표: 쌀 생산량과 일본 반출량 (쌀 생산량 - 조선총독부, 농업 통계표, 1930 / 일본 반출량 - 조선 총독부 통계연보 1920 ~ 1930)
사진: 부평 수리 조합이 건설한 저수지. 전국 각지의 수리 조합은 과도한 조합비 문제뿐만 아니라 저수지 공사를 맡은 일본인 토목업자들의 부실 공사와 횡령으로 논란을 일으켰다.